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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는 유명한 공연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2000년 대부터 뮤지컬을 비롯해서 다양한 장르의 공연 산업이 발전하면서 크고 작은 공연장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샤롯데시어터와 같은 뮤지컬 전용극장부터 예스24라이브홀을 대표로 하는 콘서트 전용 공연장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최초 극장은 어디일까요?  우리 손으로 만든 대한민국 최초 극장 애관극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대한민국 최초 극장 애관극장 @한국일보
대한민국 최초의 공연장 애관극장 @한국일보

 

대한민국 최초 극장의 구분: 정동 협률사, 경동 협률사, 원각사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에 대해서는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의견이 다소 나뉩니다.  우선 가장 정설은 1902년에 서울 정동에 세워진 '협률사'라는 극장을 최초라고 하는 의견들이 많습니다.  여기에서 '사'는 모인다는 뜻의 '모일 사(社)'를 씁니다.  협률사는 조선 후기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의 재위 40주년을 경축하는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지은 곳입니다.

 

이후에 여러 연구를 거쳐서 정동에 세워진 협률사보다 10년이나 먼저인 1892년에 이미 극장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부좌'라는 이름의 극장은 정동 협률사보다 10년 앞선 국내 최초의 극장이지만  일본인들을 위해서 일본인들이 만든 공연장이기 때문에 우리의 극장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가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극장은 인부좌보다 3년 뒤인 1895년 인천 중구 경동에 세워진 '협률사(協律舍)' 입니다.  정동 협률사가 '모일 사'를 쓰는 데에 반해, 인천 협률사는 집과 가옥이라는 뜻의 '사(舍)'를 사용합니다. 

 

인천 경동 협률사는 현재 애관극장의 뿌리입니다.  서울 정동에 만들어진 정동 협률사보다는 7년, 그리고 1907년에 종로에 개관한 단성사보다는 12년이나 먼저 만들어진 극장입니다.  영화와 극장 역사의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극장을 정동 협률사라고 하고, 인천 경동 협률사는 우리나라 사람인 조선인이 설립한 최초의 극장이자 공연장이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기준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이라 일컬어지는 원각사가 1908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창극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민속악인 잡가와 풍자연극인 잡희를 공연했던 상설극장이었으나 1914년에 화재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 극장의 이름 변화: 협률사, 축항사, 애관극장

애관극장의 전신인 경동 협률사는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발발했던 청일전쟁 중에 지어진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극장입니다.  부산 출신 사업가인 정치국이라는 분이 연극 전용 극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1911년 축항사로 이름이 변경됩니다.  혁신단이라는 연극단체의 단장인 임성구 단장이 이름을 지었습니다.  10년 뒤인 1921년에는 홍사헌이라는 인천 지역의 인사가 축항사를 인수하면서 '애관'이라고 다시 한번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1915년과 1924년에 극장명이 바뀌었다는 추측도 있었지만 신문 기사 등 언론에 '애관'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이 1921년이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1921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애관극장은 연극과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연극 공연장이자 영화관이었습니다.  강연과 연주회도 개최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다목적 공연장과 같은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축항사에서 애관극장으로 이름이 바뀌던 시기의 관람료는 가장 싼 좌석이 50전, 가장 비싼 좌석이 1원이었다고 합니다. 

 

2020년 4월 3일 스포츠동아 기사 '경마 역사상 최초 최고 기록을 찾아서 '라는 기사에 의하면, 1921년 1원의 가치는 현재의 약 16만 원 정도라고 합니다.  지금 뮤지컬 공연계에 형성되어 있는 VIP 좌석이 15만 원 정도 하니 100년 전에도 공연은 참 많이 비쌌던 것 같습니다.

 

 

애관극장에서 상영한 영화와 공연 기록

1927년에 완공된 애관극장은 약 800명의 관객들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르네상스식 건물입니다.  극장이 완공되고 난 3년 뒤인 1930년에 인천에서 처음으로 발성영화인 '야구시대'가 상영되었습니다.  발성영화란 지금 우리가 보는 영화처럼 화면과 함께 소리가 나오는 영화를 말합니다.

 

이렇게 영화로 인기몰이를 한 애관극장은 1935년 한 해동안 15만명의 입장객이 다녀갔습니다.  이후 1940년대에는 남조선 무용예술 콩쿠르,  올림픽 파견 레슬링 경인대시합, 영화 '수우', 가수 한명숙의 데뷔 공연  등 무용, 콘서트, 영화를 비롯한 예술 분야뿐 아니라 스포츠 경기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영화 '수우'는 배우 최불암의 아버지인 최철 건설영화사 대표가 제작한 영화였습니다.  또 가수 한명숙은 우리가 잘하는 대표 트로트 음악인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유명한 가수입니다.      

 

 

현대 애관극장의 모습

애관극장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지어졌습니다.  1950년에 발생한 한국전쟁 때 애관극장은 함포사격으로 반쯤 부서졌지만 문화 공연과 영화를 계속 선보였습니다.  전쟁으로 망가진 건물을 1954년에 신축으로 새단장했습니다.  

 

그다음 해인 1955년에는 현존하는 피아노의 거장인 세이모어 번스타인의 내한 공연을 유치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에 해외 아티스트의 공연을 유치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완공된 지 40여 년이 지난 1960년에 다시 신축을 해서 800석 규모의 극장에서 400석 규모의 소극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번 개보수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면서 완전히 영화 전용 상영관으로 바뀌었습니다.  

 

현재 애관극장의 대표는 탁경란입니다.  1972년에 부친인 탁상덕 사장이 애관극장을 인수한 이후 50여 년 간 극장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탁상덕 사장은 1989년에 애관극장을 인천 최초로 영사기와 입체음향설비를 갖춘 영화관으로 개관했습니다.  당시에는 서울, 부산, 대구 다음인 전국에서 네 번째 영화관이었습니다.  미국 조지 루카스 필름의 기술자들이 한국에 와서 직접 시공했다고 언론에서는 보도했습니다.

 

지금은 멀티플렉스 상연관으로 인해 어려운 경영난에 처해 있지만  이렇게 역사 깊은 극장인 애관극장은 관이 1개뿐인 단관극장임에도 연평균 관람객 60만 명을 유치해 온,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에 대한 소개와 의의, 역사를 알아봤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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